“현충사는
이순신(李舜臣) 장군 사당이라기보다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기념관 같은 곳이다.” 얼마 전 파문을 일으켰던 한 공직자의 발언은, 오랜 세월 동안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우리 사회에서 가졌던 함의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국가를 수호하는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상징이었으며,
위인전과 드라마의 주요 소재였다.
그랬던 그가 이제 ‘일방적
영웅화’의
신화를 조금씩 탈피하면서 본격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가 남긴 일기 ‘난중일기’가
500여년만에 모두 탈초(脫草)·완역됐고, 객관적 자료에 의거해 그를 연구한 논문들도 쏟아지고
있다.
최근 이찬구(대전대 철학박사)씨가 ‘이순신연구논총’(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刊)에 기고한 ‘충무공
이순신의 삶에 나타난 천도관(天道觀) 고찰’은
16세기에 살았던 인물 이순신의 사고방식을 철학적으로 연구한 논문이다. 이씨는 #하늘·땅·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한국 고대의 천(天) 사상 #도덕의 가치를 숭상하고 위민(爲民)을 앞세웠던 16세기 유가(儒家)의 천명(天命) 사상 #심신을 수련하면서도
개인보다는 국가를 중시했던 전통적 낭가(郎家) 사상이 이순신의 천도관 속에 반영돼 있다고
본다.
이런 사고방식은 이순신의 말에서 드러난다. “죽고
사는 것이 천명에 달렸으니 술을 마셔 무엇하랴?”는
말은 생사에 미련을 두지 않는 순천(順天)·순리(順理) 의식을 반영한 것이고,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다”는
노량해전 직전의 말은 도덕적 사명으로서의 죽음을 천명과 일치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제장명 해군충무공수련원 연구원이 같은 책에 기고한 ‘조선시대
이순신에 대한 인식의 변화과정’은
“1980년대 이후 이순신 성웅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긴 것은 그 동안 이순신의 선양 방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
지적하며 정확한 사실 추구보다 신격화가 앞서서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조선 후기의 이순신에 대한 인식은 매우
긍정적이어서 현대의 흐름과 어긋나지 않지만, 이순신이 생존했던 선조 때에는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에 의해 ‘허위보고설’과
‘원균
모함설’ 등 일부 부정적 인식이 있었다며 좀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문학에서 드러나는 이순신상(像)의 변화를 추적한 연구도 있다. 최영호
해군사관학교 교수는 최근 열린 학술세미나 ‘다시, 이순신리더십을 생각한다’의
발표문 ‘북한의
이순신 소설 연구’에서
“남·북한
모두 최근에는 우상이나 신으로 군림하는 존재가 아닌 피와 살이 감도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북한 작가 김현구의 ‘리순신
장군’ 같은 작품에선 하층민들과 유기적인 인간관계를 갖는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역사평론가 이덕일씨는
“그동안의
이순신 연구가 정권 차원에서의 의도된 것이었다면, 최근의 연구들은 인간적인 면모와 그 당시의 관련 인물,
시대상까지 포괄하면서 지평을 넓히고 있다”며
“16세기 조선이라는 구체적 시공간 속에서 살며 지녔던 객관적인 역할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